쓰레기가 아니야
- 이수진
- Aug 9, 2017
- 3 min read

(이 그림은 학생의 그림과 비슷하게 작가가 재생한 것임)
하와이 YWAM (Youth with a Mission) 열방대학의 순수 미술학교에서 강의를 할 때였다. 주로 내가 맡은 강의는 드로잉 기법과 그림을 통한 소통 방법이었다. 그해에는 유독 많은 지도자급 사람들이 그 수업을 듣게 되었고, 특히 많은 수의 남학생들이 참석해 열심히 수업을 듣고 그림도 그리고 있었다. 피지 Fiji에서 온 30대의 남학생 K는 하와이 열방 대학 에서 지도층에 있었고, 하와이 현지인들과 흡사한 문화와 모습 때문이었는지, 그 지역사회에서도 많은 일을 하고 있었다. 미술학교 수업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이며 나날이 그림솜씨가 늘고 있었기에 나도 나름 그에게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내 수업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인 간증을 담은 그림이 마지막 과제 시간이었는데, 늘 하던 작은 사이즈의 도화지가 아닌 방 문 하나정도 사이즈의 큰 그림을 그려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모든 학생들이 먼저 스케치들을 하며 준비 작업을 하며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K는 왠지 우물쭈물하여 그림을 못 그리고 있었다.
“K, 무슨 일이지? 그림을 이 반에서 둘째라면 서러워할 당신이 왜 스케치조차 못하고 있어?” 나는 염려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리는 것은 문제없이 하겠어요. 하지만, 제 어린 시절의 기억을 그리려 하니까 잘 안 돼요….” 라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내게 집에서 그려온 스케치 몇 장을보여주었다. 한 남자의 뒷모습을 그린 것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남자의 손에는 검은 큰 물건이 있었다. 나는 이게 어떤 그림이냐고 물었다.
“아버지에요. 제 아버지요. 전 어릴 적부터 아버지와 좋았던 기억이 없어요. 아버지에게 늘 맞고 자랐고요. 이게 저에요. 검은 쓰레기봉투요. 아버지에게 전 쓰레기였어요. 그냥 끌고 다니는…” 그는 벌써 흐느끼고 있었다. 상징적으로 자신을 검은 쓰레기로 표현한 것이었다. 검은 피부에 파마머리 같은 긴 머리의 남태평양 섬사람, K는 누가 봐도 튼튼하고 강인한 남자였다. 항상 밝고 검고 큰 눈망울이 참 인상 깊었던 이 남학생. 누가 이런 가정 사를 가슴에 안고 살고 있었을까 상상이라도 했을까?
“그랬군요. 본인이 쓰레기 같다고 느꼈군요?” 나는 그가 뱉어낸 단어를 다시 되뇌어 주었다. 세상의 다른 어떤 물체가 아닌 ‘쓰레기’라는 단어로 자신을 정의하다니. 얼마나 아버지에게 사랑받고 싶었을까? 얼마나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에게 안겨 다니고 싶었을까? 얼마나 슬펐을까? 나는 잠시 그에게 실컷 울 수 있도록 시간을 주었다. “선생님, 그림을 그릴게요. 꼭 다 마치겠습니다. 시간을 조금만 더 주세요. 집에서 기도를 좀 더 해 보겠습니다.” 그러면서 K는 축 늘어진 어깨를 하고 교실을 나갔다.
다음날 다른 모든 학생들은 작은 스케치를 큰 사이즈 도화지에 옮기는 작업과 가지고 온 사진이나 인쇄물을 모델로 해서 마지막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나는 K가 아버지와 쓰레기봉투를 잘 그리고 있나 보러 갔다. 그런데 그의 도화지엔 그 그림이 없었다. 대신 전혀 다른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전체가 검게 칠해져 있고 가운데 환한 길과 같은 모양의 그림이었는데, 그는 동굴이라고 했다.
“집에 가서 기도하면서 많이 울었어요. 왜 이런 아버지를 주셨냐고 하나님께 질문했어요. 잊고 있던 옛날 기억이 너무나 아프게 떠오르는 거예요. 아버지에게 심하게 맞던 거며, 아버지의 무서운 표정하며… 그렇게 하소연을 한참하고 나서 하나님께 말했어요, 우리 아버지는 제가 어찌할 수 없으니, 알아서 처리하시라고 했어요. 저는 이제 마음속에서 아버지의 그런 기억을 없애고 싶다고요. 그러니까 마음이 좀 편해지더라고요.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이 그림이 떠오는 거예요. 진짜 이런 곳에 간적도 없는 데, 제 머릿속에 빛이 비쳐있는 동굴인지 터널인지가 떠올랐어요.” 신나게 이야기 하는 그의 얼굴에도 빛이 빛나는 것 같았다.
모든 명암을 다 그려 넣고 마지막에 본인의 싸인 까지 마친 K의 그림은 보는 이들의 마음까지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하는 것 같았다. 육신의 아버지는 자신을 쓰레기처럼 다뤘었지만, 하나님 아버지가 자신을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하는 그림이라고 그는 자신의 그림을 설명했다. 하나님이 자기를 그림을 통해 아픔에서 치유로 인도 하셨다고 했다. 그는 아버지를 용서하고 갇혀있던 마음의 감옥에서 자유를 얻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학우들과 간사들도 모두 함께 눈물을 흘렸다.
“K, 당신은 쓰레기가 아니야. 아주 소중한 존재에요.” 나는 그에게 시편139편 13-14절을 상기시켜 주었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한 사람 한 사람 귀하게 만들어져 이세상의 부모에게 보내졌는데, 하나님의 마음과는 너무 다르게도 어떤 부모들은 아이들을 이렇게 함부로 대해 상처를 준다. 아이들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닌데……. 이제는 큰 어른이 되어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여도 어린 시절 할퀴어진 마음은 시간이 지나도 쉽게 낫지 않는다.
간단히 긁적거린 옛 기억의 그림에서 어린 시절 아픔을 볼 수 있다. 말로는 감출 수 있어도 생각에서 조차 별일 아니었다 묻어버려도, 그림에서 속이지 못하고 나타날 때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우리마음의 엑스레이 X-ray같은 것. 마음이 곪았다고 치료하자 하신다. 겁내지 않고 ‘하나님, 나 고쳐주세요.’ 하면 K처럼 치유 받을 수 있다. 잠시 아프지만, 건강한 내일을 위해 오늘 하나님께 물어보면 어떨까? “하나님, 제 마음을 그림으로 보여주세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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