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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어둔 트라우마

  • 이수진
  • Jul 29, 2017
  • 3 min read

어머니에게 끌려오다시피 한 12세의 한국인 남학생은 그림 그리는 것을 꺼려했다. 다른 심리 치료사들에게 가지 않고 하필 미술상담을 하는 내게로 왔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그래서 아주 쉽게 접할 수 있는 ‘휘갈겨 그리기 (scribble)'를 하게 했다. 이 미술치료 기법은 자유롭게 자신의 상상을 투영할 수 있어 무의식과 잠재되어 있는 감정을 해소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소년은 내가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에 마음이 놓이는 지, 종이 한 장에 실타래 마냥 선을 그려 넣었다. 그 다음에 나는, “이 그림에 뭐가 보여요?”라고 질문했다. 소년은 ‘밤’, ‘갈고리’, ‘눈’이 보인다고 했다. 그리고는 그림들을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어 보라는 내 제안에, “갈고리를 먹었다가 다쳤어요. 그래서 눈이 슬퍼요,”라고 답했다. 그리고는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다음 상담시간에 나는 소년에게 여러 가지 색을 사용하도록 했다. 그리고 ‘기억’이란 단순한 제목을 주었다. 그는 다른 색을 고르는 것을 힘들어 하며 그냥 연필을 사용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꽤나 큰 종이를 택한 소년은 한 종이 안에 여러 장면을 그렸다. 머릿속 떠오르는 여러 개의 기억들인 것 같았다. 만화책처럼 한 장면 장면을 종이의 각 모서리에 자리하도록 배치를 한 것이 좀 특이했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내내 흥얼거리기도 하고 킥킥대며 소리 없이 웃기도 했다. 밑그림이 다 그려졌는지, 나중에서야 크레용을 집어 들고 색깔을 입혔다.

그림을 설명하라고 하자, 소년은 필리핀에서 선교사 부모님과 살았던 이야기들이라고 했다. 세 번의 큰 태풍이 소년이 있던 도시를 덮어 이사를 여러번 해야 했다면서 유독 파란색으로 칠해 놓은 ‘물’을 설명했다. “더러운 진흙탕이 싫어요! 그래서 물은 다 파래야 해요.” 그리고 보니 소년의 그림은 파란 물이 많이 그려져 있었다. “난 물이 무서웠어요. 물이 신발에 묻는 게 싫었어요,”라고 말하는 소년의 눈에서 자신이 통제할 수 없었던 상황들 속에서 그가 느꼈던 공포감이 실려 있었다. 또 물이 무서웠던 또 하나의 사건도 이야기 했는데, 어렸을 때 물에 빠진 적이 있었다고도 했다.

그래서 그는 홍수때 본 물색깔인 황토색이나 고동색 대신 파란 색을 사용해 물을 그렸던 것이다. 왠지 파란색을 통해 물을 통제하는 것처럼 미술 활동으로 그 공포감을 이겨냈다. 아마도 그림 그리는 중간 중간에 흥얼거리고 킥킥거렸던 이유인 듯 했다. 이렇듯 미술상담과 미술치료는 그림을 통해 내담자의 심리상태를 진단하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미술활동 자체를 통해 문제를 풀기도 하고 과거를 돌아보는 치료요법이 되기도 한다. 예전의 기억의 본인은 상황통제를 할 수 없었지만, 돌이켜 그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려내며 이제는 통제할 수 있음을 인지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필리핀으로 파송을 받았던 이 선교사님의 아들은 수년간 아픔을 겪으면서도 부모에게 조차 이야기 하지 못하고 그 아픔을 가슴속에 묻어놔 치료받지 못하고 곪게 되었나보다. 학교에서도 적응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고 가족 간에 소통도 잘 되지 않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어머니가 내게 도움을 청한 것이었다. 소년은 나와 몇 번의 미술상담을 통해 그동안 자신을 공포 속에 가두어 두었던 기억에서 해방되어 내면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은 어려서 잘 모를 거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아이들의 상처는 별로 심각하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아픔을 덮어 두려고 한다. 마치 아이들의 아픔의 깊이를 정면으로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는 것처럼. 소년의 부모님도 그랬다. 마지막 상담시간은 소년만이 아닌 그의 보모님과 함께 했다. 아이의 겉에 보이는 증상만으로 아이만이 문제아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마주한 문제는 그 가정 전체의 것이었다. 부모님은 사역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아이와 소통을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소년의 부모와 상담을 할 때, 그의 아버지는, “사내 녀석이니 잘 견딜 것이라고 생각했다,”라는 말로 얼버무렸다.

그리고는 그의 부모가 소년보다 더 많이 울었다. 봇물 터진 듯, 자신들도 묻어놓았던 선교사역할 때 힘들었던 마음과 죄책감도 눈물로 토해냈다. 각기 숨겨 놓았던 감정에 솔직해 지자, 마음속의 진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진정한 소통의 시작이었다. 문제가 모두 해결 된 것은 아니지만, 소통의 방법을 배웠고, 이들은 이제 하나의 공통체로 기능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림 속에서 오랫동안 묻어놓았던 트라우마(trauma)가 발견 되었기에…….

교수 이수진

남부개혁대학교 미술상담학 교수

예수전도단 열방대학 YWAM 강사

풀러신학교 심리학 가정학 석사

죠지메이슨 대 미술 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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