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농
- 이수진
- Jul 15, 2017
- 3 min read

거실 등이 아주 나가버려 할 수 없이 초를 켰다. 몇 개는 촛대 그릇 안에, 몇 개는 그냥 테이블위에 그릇 없이 놓아두었다. 동그란 원형 초라서 얌전히 녹아들 줄 알았는데, 한두 시간을 똑같이 보낸 후 보니, 그릇 안에 놓아두었던 녀석들이 마구 쏟아져 나와 있었다. 그냥 그릇 없이 놔 두었던 초들은 아직도 조용히 몇 방울의 촛농만을 흘리고 얌전히 타고 있는데…….
마구 흘러내린 촛농을 닦으며, 왠지 귀찮다는 생각보다는, 얌전히 타고 있는 초 몇 대가 안쓰러웠다. 꼭 그동안 상담하던 사람들의 맘 같았기 때문일까? 바깥세상에선 곳곳한 자세로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가야 하는 데, 날 만나면 기댈 곳을 찾은 양 마구 녹아버리는 사람들의 마음과도 같았다. 난 그저 맘속 깊은 곳에 묻어버린 눈물들을 받아주는 눈물 그릇 같다.
수년전, 크리스천 뮤지컬을 하는 그룹을 대상으로 하나님의 치유에 관해 강의를 하고 미술상담을 한 적이 있었다. 자신의 마음을 그림으로 표현해보라고 했는데, 그 그룹 리더였던 한 남자 간사가 따로 자기를 상담해 달라고 했다. 빡빡 머리에, 팔뚝엔 문신을, 한쪽귀엔 귀걸이를 몇 개나 하고 있어 크리스턴 뮤지션보다는 헤비 메달 록 밴드멤버를 연상케 하는 그를 왠지 가까이 하기에 꺼려짐을 애써 누르며 그의 해맑은 미소에 초점을 두기로 했다.
하지만, 그가 그린 그림은 참 이상한 그림이었다. 주로 마음을 그리라고 하면 대부분 하트모양을 그리는데, 그런 것도 아니고, 꼭 동화책 삽화같이 잘도 그린 그림이었다. 한쪽엔 검은 선글라스를 쓴 담배를 든 아저씨와 커다란 선인장이 있었고, 그 왼쪽으로 넘어져 아파하는 아이가 있는 데 집이 한 채 뒷 배경으로 그려져 있었다. 왠지 외로움과 슬픔이 느껴지는 그림이었다. 잘 그렸지만, 왠지 이상한…….
그 큰 덩치로 상담시간보다 다소 늦게 도착한 그는 벌게진 눈으로 자꾸 쏟아지는 눈물을 어찌할 바 모르고 손등으로 자꾸 닦아내고 있었다. 아마도 상담 전 혼자서 울다가 온 모양이었다. 한참을 우물쭈물 하던 그가 입을 뗐다. “엄마의 남자친구인 이 아저씨가 아빠 같은 존재였습니다.” 아버지 사랑을 받고 싶었었던 소년시절로 되돌아간 듯 그는 울먹였다.
내가 말을 이었다. “그림속의 아저씨는 좋은 사람이 아닌 것 같군요.” 그림에 보이는 것을 말해주었더니, 그는 계속 울었다. “이날은 내가 선인장위에 넘어졌어요. 많이 아팠고요. 선인장 가시가 마구 박혀버렸었는데… 근데 아저씨는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나에게 욕을 하고는…” 그의 눈은 까마득히 먼 그날로 돌아가 보호자 없이 아픈 아이의 눈이었다. 대여섯 살 아이같이, 그때 다 못 울었던 그 기억으로 돌아가 그는 한참을 울었다.
“남자는 강하여야 한다. 감정을 나타내서도 안 돼. 바보나 우는 거야.” 이런 말을 듣고 자란 그가 기댈 곳은 없었다. 특히 그런 마음들을 풀어놓을 집이 그에겐 없었던 것이었다. 그가 그린 집은 그런 바람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런 집이 없어서, 그는 마음속 깊은 곳에다 그 눈물을 쌓아놓았더랬다. 그가 아버지의 사랑을 바라고 구한 것이 얼마나 당연한 일인지.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디자인하셔서 궁극적으론 하나님 아버지를 찾는 소망을 우리 안에 넣어 주신 것임을 이야기 했다. 하나님 “아빠”가 그런 사랑을 주신다고…….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그는 맘껏 그 상한 감정들을 쏟아 놓았다. 누구도 정죄하지 않는 안전한 곳에서, 그는 자유롭게 그의 진정한 영적“아빠”를 만났다.
“Thank you, Soo!” 라고 말하며, 한손으로 내손을 힘껏 쥐어 악수하고, 한 손으론 그 시원한 눈물을 훔치며 일어서는 그는 더 이상 “상처받은 아이”가 아니었다. 마음이 여리고 예민하기에 시와 같은 랩 (rap)을 그렇게 잘도 하였겠지 생각했다. 돌담같이 큰 어깨와 현란한 문신 밑에 숨겨있던 아팠던 어린 마음이 “아빠”의 푸근함 속에서 녹아져 버리는 순간이었다.
초는 아무리 예뻐도 녹아버린다. 예쁘게 얌전히 녹아내리면 좋지만, 결국 녹아 버린다. 그게 초의 특성이다. 이와 같이 우리들의 감정은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작품이다. 좋을 때, 안전한 장소에서 그런 감정들이 나올 수 있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해서 우리의 맘이 병들어 간다. 아픈데도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은 척,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하면, 결국 우리 몸까지도 병이 든다. 게다가 영적으로도 뒤틀어져 버려, 하나님을 오해하고 피해의식에 사로 잡혀 살아가게 된다.
솔직히 우리의 상한 맘의 촛농을 다 받으실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아빠”뿐이다 그 분은 그릇이 한없이 넓고 깊어 우리가 얼마든지 망가져도 야단치지 않으신다. 그저 말없이 받아 주시고 닦아주신다. 아주 먼 옛날이야기 같은 오래된 감정들까지도 오늘 오셔서 치유하실 수 있다. 오늘은 나도 “아빠” 그릇 안에서 한없이 녹을 까 한다. 맘 깊이 싸 놓았던 어린아이같이 유치한 감정들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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